잠든 상태로부터 벗어나려면, 자신이 잠들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상 자체에 완전히 '빠져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좀체로 알기 어렵다.
'빠져 있다'는 말은 그 자체로 진실을 드러내 준다. 그것이 무엇이든 무언가에 깊이 빠지면 시야가 흐려지고, 분별력이 상실된다. '빠져 있는' 사람들은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와 가벼움, 편안함을 누리지 못한다. 생각에 빠지고, 음악에 빠지고, 사랑에 빠질 때 당신의 분별력은 흐려지고, 내면에 잠재된 엄청난 잠재력의 발현 가능성 또한 상실된다.
'빠져 있는' 상태는 잠들어 있는 상태와 같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사람들 주변에는 언제나 함께 잠들어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집단 최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므로, 집단 펜듈럼이 주는 유익을 맘껏 누릴 수 있다. 그 대신 그들은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사는 자유를 집단 펜듈럼에게 내어 준다. 이 최면 효과는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대게 평생 지속된다.
필자는 이런 종류의 글을 쓸 때마다 사람들을 향한 깊은 연민을 느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존하는 수단이 오히려 그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시리다.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너무 힘들게 살고 있다.
사람들은 깊은 정신적 마취 상태에 빠져 있는 듯 보인다. 그들은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왜 추구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시간관리나 셀프 리더십이라는 개념과 도구들은 스티븐 코비가 주장하고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사람들을 효과성effectiveness 중심의 삶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효율성'과 '긴급성'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패러다임 전환이란 과학에는 쓸모가 있을지 모르나 치열한 삶을 살 수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근본적인 대안이 되지 못한다. (패러다임 전환은 '감정'이라는 강력한 에너지-정보체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변화에 있어 사실상의 주된 장애물은 낡은 패러다임이기 이전에 불안하고, 두려운 감정들이다.)
오히려 그런 종류의 리더십 개념들을 접할 때마다 대다수 독자들은 현실적인 딜레마에 빠진다. 그들이 의지를 사용하면 할수록, 그들의 삶은 더 치열한 전쟁터가 되어 간다. '의지willpower', '주도성proactivity'이라는 개념은 필자가 오랫동안 강조해 왔던 대로 인생을 좀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치명타를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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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이유는 '균형력'때문이다. '의지'와' '주도성'은 본디 '부자연스러운unnatural', 다시 말해 우주를 관통하는 핵심 원리인 '균형력'에 맞서는 개념이기 때문에 '의지'와 '주도성'의 결과는 언제나 대립적인 상황으로 귀착된다. 물리계를 지탱하는 가장 근원적인 원리가 바로 이원성에 근거한 '균형력'이기 때문에 이처럼 '단호한', '용맹스런', '진취적인' 행동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긴장을 만들어 내고 급기야는 피투성이가 된 여러 명의 부상자들, 사상자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항상 소수만 승리하고 성공하는 모델은 그 이론이 근거하고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현대사회가 억지로 쑤셔 넣고 있는 '성공(?)'이라는 부당한 개념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디자인design(필자는 기질을 보다 근원적인 맥락에서 이렇게 표현한다.)을 가진 사람들을 강력하게'조건화conditioning'시킨다. 자기개발 전문가(?)들이 말하는 승리, 성공이라는 것이 모두에게 필요치 않다는 사실은 인간 고유의 디자인(astrology나 human design에서 말해 주는 소우주-대우주 원리에 기반한 기질파악 도구)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인간 존재human being에 대한 몰이해와 무관심은 무지에 의한 행동을 계속 촉구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귀결은 언제나 같다. '단호한 의지', '영웅적인 결단력', '자신을 불사르는 헌신' 등이 그것이다.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언제나 이런 식의 주도적인 해결책이 성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그려져 왔다.
그러나 이런 식의 외압은 일반 독자들은 물론 자기계발 전문가들 자신조차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나는 이러한 결과를 십 수 년간 현장에서 목도해 왔다. 여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들 자신에게도 힘겨운 방법을 (자신이 그 방법밖에는 모른다는 이유로) 독자들에게 강조하는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 '일방적 폭력'과도 같다. 독자들은 그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의지'와 '전략'과 '행복'이라는 마취제를 정기적으로 복용하며 최면 상태를 유지한다. 아무도 당신이 깨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 방법만이 자기계발 산업이 돈을 버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에게는 '내적 불일치'가 있기 때문에 '한결같은' 주장을 할 수는 없다. 단지 괜찮은 척 할 수 있을 뿐이다.)
집필 중인(이미 완성했지만 몇 군데 손을 더 보기 위해 작업 중인) 원고에도 밝혀 두었지만, 자기 본래의 디자인을 알고, 가장 강력한, 그리고 실질적인 장애물인 '감정emotion'을 제대로 다루는 법만 알면 잘 살기 위해 '애쓰거나', '발버둥칠' 필요가 전혀 없다. (정말이지 어떠한 노력도 필요없는 상황이 곧 펼쳐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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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필요한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통합적 시각이다. 이미 켄 윌버ken wilber가 여러 차례 너무도 명징하게 지적해 왔기 때문에 필자가 맥락을 보탤 필요는 없어 보인다. 대부분의 자기계발 이론들은 뿌리가 썩은 나무와 같다. 자기계발 이론들은 잠시 동안은 당신은 기억에 의해 '조건화된conditioned' 행복으로 인도할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당신을 더 바쁘게, 자신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탈을 쓴 채 같은 트랙을 맴돌게 할 뿐이다.
감사하게도 2012년에는 18년 동안 매달려 왔던 모종의 해결 방안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원리적인 그러나 매우 실질적인 여기에 충분한 임상이 뒷받침되는 강력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이에 대한 presentation은 2012년 특별공개강좌 7편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이를 간략히 표현하면 다음의 두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재교육'과 '탈조건화'. 영어의 뉘앙스가 도움이 되므로 영어 표현으로 한 번 더 말해 보겠다.'Re-education'과'De-conditio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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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재교육'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근본부터 다시 다뤄야 한다. 지금은 '평생교육'이 필요한 때가 아니라 '재교육'이 필요한 때다. '평생교육'은 인간 존재에 대한 원리적 이해를 기반으로 한 '재교육'없이는 성과를 거두기 힘들다.
재교육 이후에는 이를 기반으로 한 '탈조건화'가 요구된다. 인간은 그가 나고 자란 사회/문화적 배경의 정신적 노예가 되기 쉽다. 때문에 '다름의 과학science of differentiation'을 기반으로 각 개인이 자신만의 고유한 디자인과 영향력을 인정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사회화의 때를 벗겨 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의 통합된 프로세스를 통해 가능하다.
필자가 고안한 '실현모델(Recognize-Dissolve-Discover-Plan-Do, 스티븐 코비의 이론에 Recognize와 Dissolve를 더했다)'에 따르면 이같은 통합적 접근은 각 개인을 가장 단기간 내에 자신 고유의 삶을 살도록 해 준다. 게다가 첫 두 과정(Recognize와 Dissolve)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기존 자기계발 전문가들이 강조해 왔던 이후 세 과정의 필요성은 눈에 띄게 줄어들거나 아예 없어지게 된다.
당신의 남은 삶이 여기에 달려 있다. '성공하려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류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온 독자들에게는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방식의 접근이 낯설고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변화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다. 당신에게 분명한 '의도'가 있다면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데 그리 많은 노력이 필요치 않다.
2012년은 필자와 WCCF(필자가 설립한 단체)가 이 세상에 진정한 비전을 제시하는 해이다. 당신에게 들을 귀가 있다면, 앞으로 당신의 삶은 혁명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 혁명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즐겁다.
여행을 떠나라. 시대의 조류가 당신의 변화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급선회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때이다.
그러나 만약 수 많은 프로필을 달고도, 정작 실력자들 앞에서 자신을 증명하지 못하면 당신은 틀림없이 하수다.
그럼에도 당신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면 당신은 고수를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일 뿐 아니라, 더 낮은 하수들에 둘려 싸여 자
신을 감추고 있는 풋내기에 불과할 뿐이다. 진정한 고수는 프로필, 자신이 속한 단체, 무슨무슨 인증으로 자신을 감싸지 않는다.
고수에게는 아무런 타이틀도 없다. 그의 앞에 붙는 유일한 타이틀은 이것뿐이다. '명인名人' 000.
오직 하수들만 자신의 이름을 치장하고, 그럴 듯한 프로필 사진에 의존해 여기에 혹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낚아챈다.
당신이 고수가 아니라면 함부로 검을 빼들지 말라.
하수들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여태껏 우리 사회는 프로필 부풀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모두 합창이라도 하듯이, 뭔가를 달고 있어야 '그럴 듯해 보인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심지어 아직 준비조차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정보가 부족한 시대에는 이런 얄팍한 속임수가 통하기도 했다. 아니 세태를 보면 현재도 이런 속임수가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통하고 있다. 주변 지인들뿐 아니라 나 역시, 이런 유치한 속임수들을 여전히 목도하고 있다.
<나는 꼼수다> 열풍은 단지 정치권에 대한 열풍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올바른 정보', '정보의 유통', '진정성', '깨끗한 대화'에 관심을 갖게 됐고,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 더 이상 속지 않게 됐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진짜 보물을 찾아낼 힘을 스스로 가지게 되었다. 분명 이 열풍은 사회 곳곳, 깊숙한 곳까지 불어닥칠 전망이다.
현 코칭계에는 이런 기만과 꼼수가 가득하다. 코칭계뿐 아니라, 자기개발계나, 의식분야, 종교계 어느 영역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숨을 곳이 없다. 어설픈 꼼수는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얼마 전, 공개강좌에 참석한 모코치협회의 전 임원 중 한 분이 자기에게도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이 일은 내가 "WCCF라는 단체는 만 4년이 되었지만 아직 우리 기준에 부합하는 인증코치가 단 한 명도 없습니다."라는 말을 하고난 직후에 일어났다. 그 분은 먼저 자신을 소개하고 난 뒤 "전 00코치협회의 발기인이자 인증위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실 코칭을 잘 알지도 못하고, 누군가를 인증할 만한 실력도 되지 못했습니다. '양'으로 승부하다 보면,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리라 기대했는데, 생각과는 조금 달랐던 것 같습니다. 현재의 코칭계를 보면 좀 부끄러운 마음도 듭니다."와 같은 맥락의 말을 전했다.
사실 코칭현장에 오래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만 '진실을 직면할 용기'가 없었을 뿐, 이미 4~5년전부터 계속 회자되던 이야기들이었다. 단지 이번에는 당사자 중 한 분이 직접 '깨끗하게' 마음 속 울림을 나눴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었다. 세계적으로 자기개발산업에 대한 비판과 자성이 일고 있는 현 시점에서, 코칭산업 또한 예외가 아님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전부터 말해왔건만 사람들은 여전히 눈이 멀어 있고, 눈 앞에 이득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인증'이 가지는 사회적 함의를 고찰하지 못하면 결국 모두 다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다고 말했건만 용기있게 같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인증'은 무엇에 대한 인증이냐에 앞서, 누가, 어떤 자격으로 인증제도를 만들고 얼마만큼 투명하게 인증이 이루어 지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현 국내 상황을 보면 각 분야별로 인증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만 모두가 고개를 숙일 만큼의 진정한 실력자는 없다. 일단 인증을 받기만 하면, 그 인증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없고, 오직 해당 인증의 실체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 전문가로 서기에 바쁘다.
요즘같은 시대에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진정한 실력을 갖추지 못하면
그의 입지는 장기적인 차원에서 볼 때 결국 좁아질 수 밖에 없다. 국제인증도 별 의미없다. 국제인증도 결국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표준일뿐, 해당 표준이 30년을 넘겨 그 유효기간이 다할 때는 모든 요소들이 기초부터 재검토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래의 헤게모니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 코칭계로만 본다면 PCC(국제인증프로코치)는 별 의미없다. 이는 ACC인증(PCC보다
한 단계 낮은 그야말로 기초 인증)이 한 때 마치 대단한 수준인 것 마냥 여겨지던 때와 비슷하다. (때가 되자 '국제코치협회'
내에서 먼저 자성의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ACC'가 프로가 아님을 명확히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PCC에 대한 기대감 또한 실망감으로 바뀌어 갈 것이다. 이는 시대적 요청이자, PCC들의 실제 실력에 기초한 당연한 귀결이다.)
PCC가 그토록 대단한 수준이라면, 국내 코칭 비즈니스는 분명 '코칭산업'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인증과
관계없이 진정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실력자라면 굳이 인증에 기대지 않아도 많은 고객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매경의 '세계지식포럼'이나, 국민게임 '스타크래프트'는 모두 10년이 채 되기 전에 국제적 입지를 굳혔다. (코칭은 벌써 15년이 되어 간다.) 실제로 국내든, 국외든 PCC의 수준은 별 대단한 수준이 되지 못한다. 단지 이름만 화려할 뿐이다. 현 국제코치협회의 인증수준은 더 이상 현 시대가 요구하는 높은 기대 수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것도 1세대 코칭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하수는 자신이 하수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수다. 중수는 자신이 하수라는 사실을 겸허히, 낮은 마음으로 인정하는 사람이다. 중수는 실력자가 아니라, 과도기에 있는 아직은 더 많은 배움이 필요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고수는 '애씀없이 자신이 말한 만큼을 오직 실력으로 입증'한다. 만약 당신이 이 수준이 아니라면, 당신은 고수도, 전문가도 아니다. 이 기준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여겨진다면 더 나은 기준을 제시해 보라. 만약 합당하다 여긴다면 실력으로, 영향력으로 자신을 입증하라. 프로필 뒤에, 단체 뒤에 숨는 일은 비겁한 일이자, 그들의 고객을 기만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한편 초고수는 하수, 중수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고수들에게조차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고수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 (고수들은 하수, 중수들에게는 없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기에) 고수들은 초고수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들은 초고수의 범접할 수 없는 내공을 '알아차릴' 만큼의 공력을 가지고 있기에 오히려 단 한 번의 마주대함만으로도 심오한 깨달음을 얻고, 뒤로 물러날 줄 안다.
드물기는 하지만 한국에도 사회 곳곳에서 초고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지난 17년여간의 여정을 통해 그러한 초고수들을 직접 만나 보았다. 마치 <인간극장>의 '고수를 찾아서'처럼, 나는 고수 중의 고수, 초고수들을 찾아 다녔고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 초고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의 주된 흐름은 고수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그들에게는 고수를 알아볼 능력이 없기에 자기들이 최고라 여긴다. 그러나 실력 대 실력으로만 맞서는 자리가 생기면 그들은 곧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중수도 되지 못하는 하수임을,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허영심에 들뜬 하수 중의 하수임을 말이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무예의 비전祕傳들이 공유되고 있다. 국가의 장려도 있고,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이기도 하다. 무술계의 고급정보들과 실전 역량이 담긴 고화질의 영상들이 각종 서적들과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다. 과거에는 한 스승밑에서 20~30년을 배워도 다가설 수 없던 정보들에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일은 유사이래 처음이다. 때문에 이렇게 정보가 공유되면 될수록, 고수인척 하는 하수들과, 진정한 고수, 그리고 초고수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도망칠 곳은 없다. (전통적인 권력집단이 사회 네트워크 혁명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한국정부가 언론을 통제하려는, 시대를 역행하는 악수惡手를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제 여명기를 넘어, 정말로 진짜 실력으로만 겨루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미 눈 앞에 펼쳐져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권고한다. 당신이 어떤 수준의 사람인지 분명히 파악해 두라. 잘 모른다면, 당신은 분명 하수다. 자신의 실제 위치를 안다면 중수는 함부로 나서지 않을 것이며, 고수는 자신의 역량을 그의 평소 말처럼 그대로 입증해 보일 것이다. 초고수는 여전히 고요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당신이 하수라면, 빨리 인정하는 편이 오히려 낫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당신이 설 자리조차 없어질 것이 분명하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겸허한 마음으로 출발선에 다시 서라. 이제는 전 세계가 당신을 주목하고 있다. 어설픈 전문가는 더 이상 설 곳이 없다.
그러나 깨어 있는 의식은 결코 잠들지 않습니다. 침묵만이 현존하는 시간. 그러나 평소의 북적거림과 소란스러움 속에도 침묵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모든 생각의 배경이 되는 침묵을 알아차릴 수 있으면, 현란한 네온사인과 자동차 경적 소리 속에서도 깨어있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서 저녁.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 눈은 뜨고 있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잠들어 있습니다. 오직 고요함 속에 있는 자만이 눈먼 자들 속에서 눈을 뜨고 있습니다. 눈뜨고 있는 자는 눈먼 자들 속에서 잘 보이지 않지만, 그들은 아무런 애를 쓰지 않고, 의도하는대로 삶을 바꾸어 갑니다. 새벽. 침묵. 인간이라는 존재는 새벽과 같이 고요할 때만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왜 하고 있는지 자각할 수 있습니다. 자각이 깨지면, 그는 어느 곳에 있든지 잠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원자가 거기 가만히 있다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한순간 갑자기 붕괴한다면, 인과 원리로 볼 때 대체 그게 무슨 뜻일까?
무엇이 붕괴를 일으켰을까? 즉 도대체 무엇 때문에 붕괴가 일어나고 왜 하필 그 순간 붕괴될까?"
-<불확정성uncertainty>, 데이비드 린들리
마리 퀴리Marie Curie. 당신도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폴란드에서 태어나 자유를 찾아 파리로 떠난 그녀는 당시 여성에게 금기시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던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한 뒤 여덟 살 연상의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Pierre Curie를 만나 결혼한다. 그들은 방사성 원소의 발견에 지대한 공헌을 한 과학자 부부다. (1903년 이들은 베크렐이라는 학자와 공동으로 노벨상을 수상한다.)
그들은 폴로늄이나 라듐과 같은 방사성 원소를 발견하고 거기에 직접 이름도 부여했다. 그녀는 당대의 여성으로서는 (과학계 내에서의 냉대와 차별 등) 예상치 못한 엄청난 기여를 했다. 당신이 퀴리의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역사상 수십, 수백만의 과학자들 중 그녀는 분명 역사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과학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진짜 과학자였다. (그녀가 핵폐기물로부터 라듐을 추출할 때 과학 역사상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자연의 질서는 그들을 비껴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방사능에 오염되어 갔다. 이를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그녀는 인류를 위한 절대적 헌신에도 불구하고 끔직한 고통을 겪으며 죽어 갔다.
참으로 가혹하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마리 퀴리의 선택이 그토록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은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녀는 선택의 기회를 가지고 있었지만(방사능을 연구하겠다는 선택) 선택에 필요한
정보(방사능이 가진 위험성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의도가 좋든 아니든, 당신이 열심히 살든 그렇지 않든 자연의 질서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동시에 매우 냉정하게) 작용한다. 설사 갓난 아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없다. 갓난 아이는 오직 순수한 호기심때문에 압력
밥솥에 손을 가져다 댈 수 있다. 그러나 맹렬한 운동에 의해 가열된 기체 분자들은 갓난 아이의 손을 그대로 놔 두지 않는다. 물론
그로 인해 그 아이는 평생 손가락을 펴지 못하고 살 수도 있다.
당신은 정말 풍요를 원할 수도 있다. 현재까지의 삶이 너무도 고되고, 불편했기 때문이다. 천 원짜리 한 장을 사용하는데도 가슴이
두근거렸던 경험, 같은 음식을 먹을 거라면 분위기 좋은 곳보다는 값이 더 싼 곳에 은근히 마음이 더 가는 경험, 휴가철에 돈을
마음껏 쓰고 와서 두고두고 후회한 경험, 누구랑 식사를 하든지 식사값을 낼 때면 두렵고 초조해진 경험, 누군가 특급호텔에 가자고만
하면 통장 잔고부터 걱정되는 경험 등 셀 수 없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은 이런 느낌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 이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출발점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고 해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목적지가 어딘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만약
당신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고 싶다면 당신은 부산에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부산 어디쯤에 도착하는 것은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은가. (이는 당신에게 무한한 시간과 자유가 없음을 전제한 것이다. 또한 당신이 한가롭게 여행을 즐기기에는 너무도 절실한
상황임을 전제한다.)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데 '삶에서 배워 나간다.'는 말이 과연 소용있을까?
당신이 보기에는 어떤 사람은 갑자기 벼락 부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한 평생 리어카를 끌어도 식사 한 끼조차 제대로 때우지
못한다. 도대체 삶은 왜 이리 불공평한 것일까?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상황을 그냥 보고만 계신 것일까? 혹시 나도 저렇게 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걱정과 근심이 없는 날이 단 하루도 없다.
나는 그동안 최소 수십, 수백억대의 부자들은 많이 봐 왔다. 그들과 직접 식사도 하고, 대화도 나누고, 비즈니스의 세계에 대해
심도깊은 대화도 나눴다. 또한 그들 중 상당수는 내 고객이 되기도 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자수성가형 부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경제적 풍요뿐 아니라, 정신적 풍요, 신체적 풍요, 감성적 풍요도 누리고 있었다.
크게 성공한 사람들은 종종 '우연'일 뿐이었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어떤 칼럼니스트의 말대로, 그것은 준비와 기회가 만나 만들어진 우연이었다. 그들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도대체 '풍요'가 무엇이길래?
분명 경제적 풍요는 그 자체가 목적지는 아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지에 도달하는데 상당한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절체절명의 상황이 닥쳐도 굶어 죽지 않게 해 준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마음 졸이지 않고 대처해 나갈 수
있다. (가수 '비rain'가 성공을 거둔 후 첫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아 보지 못하고
떠나신 것을 제일 가슴 아파했다.)
또한 당신이 정말 제대로 된 자기계발, 또는 의식훈련을 하고자 할 때도 경제적 풍요는 도움이 된다. 감성적(정서적) 풍요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삶을 관찰해 보면, (특히나 한국사회의 경우) 경제적 풍요가 미묘하게 감성적 풍요, 관계적 풍요 등과 연결되어
있는 듯 보인다. 풍요는 분명 전체적인 것이다. 경제적 풍요만이 풍요가 아니다. 삶의 6가지
차원(영적/감성적/지적/관계적/신체적/경제적) 모두 풍요로워야 한다. 이는 인간의 당연한 권리라고까지 할 수 있다.
-세상은 '제로섬zero-sum' 게임판이 아닌가? 내가 어떻게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는가?
언젠가 '풍요'에 대한 강의가 끝난 후 한 회사원이 내게 다가와 이렇게 질문했다. "경제적 풍요나 재화라는 것이 결국 그 총량이 제한되어 있는 것 아닌가요? 제가 풍요롭게 되면 누군가는 더 가난해질 수도 있을텐데요."
물론 맞는 말이다. (그가 그렇게 믿고 있다는 뜻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사람은 믿는대로 된다.) 그러나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 삶의 6가지 차원의 풍요가 과연 제로섬 게임일까?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다음의 질문들에 답해 보라. 당신이 행복해지면 다른
사람이 불행해지는가? 당신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누리면 다른 누군가는 빈곤한 관계를 맺게 되는가? 당신이 건강해지면 다른 사람은
병드는가?
경제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제적 풍요를 얘기하기 전에 나는 우선 아주 중요한 의식현상에 대해 하나 얘기하고자 한다. 그것은
'풍요'와 '가난'의 분기점에 대한 것이다. 이 질문에 진지하게 답해 보라. 도대체 풍요와 가난의 절대적 임계점은 어디인가?
(나는 사회학적 구분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학적 구분법은 지역과 국가가 바뀌면 실제로 거의 쓸모가 없다.) 절대적이라고
말할 만한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을 것이다. 논의를 문명 사회로 제한한다면, 일반적으로 '풍요'와
'가난'은 비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강북과 강남, 관악구와 강남구같은 비교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풍요는 물질적 현상이라기 보다는 심리적이고 영적인 현상이다. 다른 한편으로 의식의 깨어남 정도가 풍요의 수준과 직결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한국사회에서의 부자들의 부의 축적 지도는 상당히 기형적이다. 상당수의 재벌들, 부자들은 마음의 평화와 관계없이
닥치는대로 돈을 쓸어 모을뿐 아니라, 약한 자를 괴롭게 하고 무시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큰 대가를 치르고
있으므로, 풍요로운 사람의 사례에 포함시킬 수조차 없다. 그들은 풍요의 예에서 제외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구소련의
양자물리학자였던 바딤 젤란드가 그의 <리얼리티 트랜서핑> 시리즈에서 아주 상세히 설명해 놓았으므로 생략하고자 한다.
-무엇을 원하는지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안 적이 있는가?
아마도 당신에게는 커피숍에서 주문하는 커피메뉴조차 맘 편히 정하지 못해 머뭇거리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공짜로
선물을 받거나, 로또에 당첨되는 경우를 제외하곤(심지어 이마저도 부담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손쉽게 얻는 경험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들에게는 삶은 단지 감내해야 할 훈련코스일 뿐,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어떤 수확도 얻을 수 없다는 맹목적인 청교도주의의 희생자로 살아간다.
그러나 당신은 안다. 커피숍에서는 원하는 메뉴를 주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레시피도 자신의 취향에 맞게 요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당신은 당신이 주문한 음료가 예상대로 나올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연하기 떄문이다.
하지만 이 당연하다는 말은 더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경험에 의한 것이다. 무수히 많은 경험을 통해 당신은 이 세계의
원리 중 하나를 알게 되었다. 당신은 주문하고, 세상은 당신이 주문한 것을 가져다 준다. (여기서 돈이 의미하는 것은 '풍요'와
'가난'의 개념과는 관계가 없다. 실제로 돈은 매우 추상적인 개념이며,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공식 E=MC^2에서 에너지쪽, 즉
추상성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대부분의 경우 당신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반대로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싫어하는지는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다. 싫어하는 것은 잘 알고 있고,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는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이는 지면의 한계를
벗어나므로 다음 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실제로 거의
없다. 수백, 수천명을 만나 직접 대화를 나눠 봤지만 대다수의 연구논문과 서적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말 모른다.
한 번 대답해 보라.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 3가지는 무엇인가? 언제, 어디서나 단 한 번의 주저함도 없이 말할 수 있는가?
-재현성있는 원리에 기반해 있는가?
사람들은 '원리'란 말만 들어도 골치가 아픈 모양이다. 이렇게 바쁜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기적인데, 전혀 와 닿지도 않는
개념을 들먹이고 있냐는 듯 보인다. 게다가 원리라는 것이 자연의 법칙과 같아서 그대로 따라하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들에게는 항시 긴장감이 감돈다. '전운'이 감돈다고나 할까.
그런데 한편으론 그들이 '원리'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원리라는 것은 한 번 익혀두면
평생동안 언제, 어디서나 활용할 수 있는 것임에도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동안 이런저런 자기계발 프로그램과 읽고 나면 잊혀지는
책들에 지쳐서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들은 원리와 원리가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원리라는 것은 일단 그 존재유무가 확인되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다. 당신만의 가치관, 경험치를 따르는 것보다
원리를 따르는 것이 백배, 천배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원리는 '최소량의 법칙'과 같은 형태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삶을
지배하는 가장 핵심적인 원리 중 하나인데 모르는 사람이 훨씬, 훨씬 더 많았다.)
원리는 그 자체로 '재현성'이라는 개념을 내포한다. 성별, 나이, 학력, 경험치, 돈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언제나 동일한 결과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같은 재현성이 원리를 따르게끔 우리를 이끄는 힘이 된다.
-원리가 있다는 사실조차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아닌가?
그러나 여러 문제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온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듣는 것조차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나는 볼장 다 본
사람이다.', '내가 해 봤는데 제대로 된 적이 없었다.', '당신이 나보다 운이 좋은 사람이다.', '잘난 척하지 마라.',
'어차피 돌아갈 때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그러니 욕심부리지 말고 살아야 한다.' 등등 그들의 입에서는 꽤나 설득력있는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물론 이들 모두 어느 정도는 진실이다. (그 신념을 가진 사람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얼마 간의
진실을 함유하고 있는 신념들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신념들은 당신에게 치명적인 독이 된다. 과학자들은 인류의
지식역사에서 가장 큰 변동이라 할 수 있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에 직면했다. 아인슈타인은 당시 20대 중반의 젊은 과학자 하이젠베르크가 발견한 원리때문에 죽는 날까지 불편한
마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집요한 노력의 산물인 ERP 패러독스 또한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과 마찬가지로 근본 오류에
의해 폐기되었는데 이 실험은 양자역학의 모순을 밝히려고 했던 실험이었다. 아인슈타인이나 슈뢰딩거같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들까지
괴롭게 했던 이 원리는 훗날 과학의 정당한 일원으로 인정받게 된다.
당신이 받아들이기 쉬우냐, 그렇지 않으냐는 사실 원리의 입장에서 볼 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마치 중력이라는 힘이 갓난아이라고
예외를 두지 않듯, 당신은 원리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원리를 '따라야 할' 기준이지, 개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지팡이의 한 쪽 끝을 잡으면 반드시 다른 한 쪽도 따라 온다.'
-절실하지만 그렇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 정작 필요할 땐 너무도 원망스럽고 절실한 것이 돈이고, 건강이고, 풍요이다. 사람들은 풍요를 갈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풍요로운 인간관계, 풍요로운 자산, 풍요로운 지성, 풍요로운 영혼의 상태 등..
그러나 막상 최악의 상황을 벗어나면 그들을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 막상 상황이 조금 나아지고 나니 이대로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금붕어뿐 아니라 인간도 망각의 동물이다. 자신이 처한 상태의 본질을 깊이 자각하지 못하는 점에서 그러하다.
풍요라는 개념은 단지 돈만 많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그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풍요라는 것은 좀 더
정확히 말해 '매 순간순간의 느낌'같은 것이다. 무엇이든 내가 순수하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언제든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느낌말이다. (여기에는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도 포함된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나 해 주고 싶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실제로는 풍요를 원하지 않는다. 좀 더
리얼한 느낌을 위해 '수동태'의 표현을 빌어 보겠다. 사람들은 풍요를 원하지 않도록 설정setting되어 버렸다.
이 말을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하자면 '내적 불일치'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당신의 마음 속은 '풍요'롭지 않아야 될 수 많은
이유들로 가득하다. '생각이 나다', '신념이 곧 나다'라는 강력한 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이 '수동태 현실'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에게는 삶은 '벌어지는' 일일뿐 아니라, '감내해야'하는 고통일 뿐이다. '내가 이렇게 힘든 삶을 사는 것은 내 부모때문에,
이 망할 놈의 나라때문이 아닌가?'
-삶은 원래 이런 것이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결국에 죽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다.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겨진다면 당장 출가를 해 산속으로 들어가라.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음 속에서는 뭔가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인생이다. (당신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선택권이 있다는 의미이다.) 나의 인생은 아니다.
생각해 보라. 혹시 당신의 오랜 생각을 스쿠루지처럼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미 있는 것, 가지고 있는 것조차 얼음처럼
차갑게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많이 봐 왔다. 돈이 없고, 학벌도 안 되고, 체력도 뒷받침되지 않고 등등... 이유가
만들어내면 수백가지도 넘을 것이다. 그러나 평생 휠체어에서 생활한 스티븐 호킹은 삶에 대해 완전히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강의를 듣는 몇몇 학생들이 먹여 주는 음식을 옆으로 질질 흘리면서도 전혀 기분나빠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감사했다.
"이것은 나에게 신의 은총입니다. 이보다 더 뭘 바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지금까지 숨쉬고 살아있는 이유 중 하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열망, 또는 (문자 그대로)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를 자각하고 있지 못하다면 당신의 삶은 순간순간 매우 힘들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답은 당신의 마음 속에 이미 다 들어 있다. 단지 배우려는 마음이 없을 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 중 몇몇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자신은 이미 해 볼 건 다 해 봤다고 푸념한다. 이 모든 것이 과연 무엇때문일까? 왜 나는 열심히 사는데도 별 변화가 없는 것일까?
당신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던지겠다.
'당신은 구조와 원리를 따라 살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열심히, 고생하며, 애쓰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지난 17년간의 여정을 통해 구조와 원리는 인간 삶의 어느 영역에나 존재하며, 이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느낌으로 볼 때) 항상 쉽지만은 않았다. 때로는 내 인생 전체가 뒤엎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 중 어떤 충격은 2~3년 동안이나 지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충격의 본질은 내 삶이 원리와 구조에 기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 내가 인정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궤변들 때문이
아니었다. 이 경이로운 우주는 스스로 정합하고, 자신을 지탱하는 원리들에 충실하다. 우주는 충실한 하수인과 같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나는 론다 번의 '시크릿'과 연관되는 것은 거부한다. 그녀의 이론들은 표면적으로는 다 맞는 얘기기는 하지만, 근본 원리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또 빈틈이 많아 일반 사람들은 결코 따라할 수 없다.)
당신이 위의 질문에 대해 100% 명료하게 답을 할 수 없다면, 당신은 아직 다 시도해 본 것이 아니다. 어쩌면 당신은 아직 출발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삶에 대해 불평하든, 있는 그대로를 즐기며 앞으로 순항을 하든 그건 궁극적으로 당신의 선택이다. (선택은 종종 불편한 느낌을 주는
듯 하지만 이는 가장 명백한 진실 중 하나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각본에 도취되어 당신이 꿈을 꾸는 것인지, 제정신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있어 선택이라는 핵심원리를 인정하지 못할 뿐이다.
당신이 앞으로 남은 삶을 (나의 친할머님의 삶은 이제 몇 달 남지 않았다. 우리 가족, 친족들 모두가 이를 감지하고 있다.)
자신의 존재대로, 핑계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처방이 필요하다. 먼 길을 돌아가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당신
외에는 아무도 불편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현재의 삶으로부터 진정한 '전환transformation'을 경험하고 싶다면
먼저 원리 앞에 겸손해지는 법부터 배워라. 당신이 어떤 잣대를 들이대든 당신의 이중적인 감정(부러워하면서도 비난하는)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최소한 몇 가지 원리들에 대해서만은 자신을 기꺼이 내어준 사람들이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 그들은 모두 같은 차원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신이 아니라면 타인에 대한 판단을 그치라. 나는 나의 길을 갈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길을 선택하라.
지난 17년간, 수 백명의 사람들을 직접 1:1로 만나고, 수 천명의 사람들과 직간접적으로 만나면서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어떤 공통적인 현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핵심만 간략히 추리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은연 중에 사용하는 말처럼 '대충대충'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고, 물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고 과정도 '대충대충'에서 그치고 맙니다. 전혀 통합적인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아시다시피, 현대물리학(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이 물리학 자신을 스스로 내부로부터 무너뜨리게 된데는 물리학 자체의 체계성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의 오류를 체계적인 탐구를 통해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이것이 부족하거나 없습니다.
-그들은 '원리principle'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원리' 그 자체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동의여부와 무관하게 존재함에도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어 원리에 칼집을 내고자 합니다. 원리는 우리가 따라야 할 대상이지, 굴복시켜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도 않습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는 실제 그 자체가 아닙니다. 굳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다루는 개념들은 본질상 전혀 본질적이지 않습니다. 이는 논리 체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현대인들은 논리적 사고가 그들의 삶의 바탕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상이 이렇고, 내 삶이 이렇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논리적'이다는 말은 실제로 매우 '비논리적'입니다. (왜냐하면 논리 자체가 인간들의 약속 위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정리'는 '공리'를 토대로 하는데, 인간의 '논리', '학문'은 모두 '공리'에서 출발합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의식훈련을 하는 사람들이 '목격' 그 자체가 아닌 '목격자'라는 역할에 집착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논리'로서는 결코 인간 의식 현상의 본성을 완전히 담아낼 수 없습니다.
-'추상적' vs '구체적', '보이는 것' vs '보이지 않는 것', '행복' vs '불행'. 이런 구분들은 애초부터 무의미합니다.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무의미합니다. 이 구분들 자체가 인간 이성의 산물일 뿐 아니라, 그 구분점조차 모호해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합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도 그러합니다. 기업의 HRD 전문가(?)들은 코칭과 같은 도구를 매우 추상적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한의학의 원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도 알 수 있듯,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등가(동등한 가치를 지님)'입니다. '등가'는 돈에 대한 개념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책을 살 때, 표지에 적혀 있는 숫자만큼의 돈을 지불합니다. 그러나 돈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책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고가의 예술품과 같이 추상적인 절차를 거칩니다. 고대인들은 '물물교환'이라는 것을 했는데, 이 당시에는 '물질'과 '물질'을 직접 교환했습니다. HRD 전문가(?)들의 말을 빌면 이러한 물물교환이야말로 구체적인 것일 겁니다. 그러나 오늘날 물물교환은 거의 없고, 오직 돈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화폐는 특정 디자인이 입력된 종이조각을 의미하지만, 그 종이조각의 사회적 가치는 인쇄된 내용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생각이며, 개념입니다.)구체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은 마음의 산물이자 편견일 뿐입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이분법은 오히려 사람들을 가두고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인간 존재를 이해하려면 통합적인 맥락이 절대적으로 요구됨에도 불구하고(애초부터 나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 두 가지의 학문으로 인간 존재를 잘라냅니다. 마치 먹기 좋게 고기를 썰어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거기서는 어떠한 진실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마치 교통체증에 화가 난 어느 운전자가 앞에 차를 보며 입을 씰룩거리지만, 그 지역 도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표면적인 이유일 뿐, 신호체계나 운전자의 마음 상태, 기온 등은 가시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앎은 '지식의 구조'와 '의식의 구조'에 대한 정합한 이해(과학에서 그러한 것처럼)로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확인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누구나 실험하고 반증해 볼 수 있는 형태로 공개되어 있습니다. 다만 아직까지 국내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삶에 치여, 그들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본질적인 앎에 다가서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덫에서 벗어나려면 '깊은 자각'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精神만 차리면 살 수 있다'라는 말은 어마어마한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精과 신神은 한의학에서 말하는 '정기신精氣神'의 한자와 같습니다. 정精이라는 물질적 세계(몸으로서의 세계)와 신神이라는 추상적 세계(마음으로서의 세계)를 함께 '알아차린다(정신만 '차리면')'라는 뜻입니다. 알아차린다는 것은 '자각'을 의미합니다. 몸과 마음에 대해 모두 깨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려면 몸이 마음에 미치는 영향과 마음이 몸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학문적으로 표현하자면 심리학, 해부학, 신경생리학, 한의학, 양자물리학 등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들은 전혀 어려운 학문이 아닙니다. 만약 200~300년 전의 부모들처럼 어린 시절부터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책을 읽게 했다면 이러한 지식을 기본 상식으로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좀 더 본질적으로 보자면, 순수한 호기심 하나로 충분합니다. 학문이나 정통한 지식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단지 '익숙하지 않은 것'일 뿐이니까요.
부정확한 정보와 지식으로 삶을 고되게 살아가는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특히 '조급함'과 '완벽주의', '체면(정말 그런데도 '아닌 척'하는 것)이라는 무의식에 물든 한국인들의 삶은 여타 나라 사람들의 삶보다 고되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에는 이런 신념이 있습니다. '외부세계나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외부의 현실이 나를 어쩔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이는 집단 무의식이 반영된 거대한 착각illusions일 뿐입니다.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외부세계는 없습니다. 현대과학이나 의식의 대가 중 어느 쪽도 이를 지지하지 않습니다.이 사실을 이론적, 실제적으로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어떤 사람은 수십년이나 걸리기도 하지만, 이는 본디 자신의 선택입니다. 마음을 여는 사람은 '실제reality' 그 자체를 발견하고, 거기에 머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국내 대학이 처한 현실은 대학universitas(우주의 진리를 찾는 곳)으로서 전혀 기능하고 있지 못한다는데 있다. 대학은 그 본질적 기능인 '비판적,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의 배양'을 전혀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은 '비판적 사고'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은 '비판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비관적'이 되곤 한다. 무지가 임계점을 넘으면 맹신의 분위기가 판을 치고, 종국에는 급진적인 믿음의 도약을 이룬다. 오늘날의 대학생들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국내에서 자타공인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모 대학 언론사의 최핵심 관계자는 국내 대학의 현실을 바늘구멍에 실을 넣을 때와 같이 정확히 주시하는 사람이다. 그는 국내 대학은 진로 결정에 대한 상담조차 제대로 제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있다고 강조했다. 대학에는 학생들의 직업과 기질에 대해 제대로 된 가이드를 해 줄 전문가가 없다. 지방으로 갈수록 더욱 심각해 진다. 그들은 소위 싸구려 전문가들을 쓰고 있어, 도움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학생들의 장래를 망쳐 놓기도 한다.
-지식의 본질은 '통합성'에 있음을 국내 대학의 식자층들은 외면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들 자신이 지식을 통합적으로 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질적이지 않은 일에 바쁘기 때문에 '단절적 지식의 조각'들만을 학생들에게 제공하며, "이것만 보고 살아라."라고 주문한다. '통합성'을 잃어버린 학생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통합성'을 잃어 버린다. 이후, 그들에게는 삶과 비즈니스가 철저히 분리된다.
+현 대학생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이다. 대학생들은 해부학과 한의학을 전자공학과 함께 배울 필요가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전체로서의 부분'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최소한 졸업하기 전까지만이라도 '기질'과 '직업'의 본질에 대해 '제대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처한 지극한 현실은 그 어느 누구도 '정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정보가 무의식적으로 축적되면 그것은 '선입견'이 되며, 이는 하나의 '운명'이 됩니다. 오직 '자각'하는 사람들만이 '나'의 본질을 꿰뚫고, '잠'에서 깨어나 '실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