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물리학, 인식론을 중심으로 살펴 본 그림자와 실제-



당신의 삶을 되돌아 보라
여기 하나의 상자가 있다. 그 상자는 매우 커서 당신뿐 아니라 친구, 가족, 그리고 당신이 속한 모든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상자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당신이 아는 모든 것들이 날 때부터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 당신은 당신의 인생이 어쩌면 어떤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영화 <트루먼 쇼>는 태어나자마자 커다란 세트장으로 옮겨져 평생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아무도 그것을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커다란 세트장에서 조명 하나가 그의 발 앞으로 떨어진다. 자신이 하늘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아니 믿었던 곳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얼마 뒤, 그는 한 명의 여성을 만난다. 그리고 그 여성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진실truth'을 들려 주기 시작한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어떤 진실들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치밀하게 구성된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큰 충격에 휩싸인다. 이윽고 그는 커다란 폭풍 속으로 배를 몰아 진실이 존재하는 곳에 다다른다.


거기에는 문이 있었다. 진정한 진실, 다시 말해 실제reality가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는 선택했다. 연기하는 삶이 아닌, 진짜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삶을 말이다. 영화는 여기에서 끝난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실제로 이런 사람이 있다면 정말 불쌍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실제로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떤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느냐고 되묻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떨까? 과연 이것이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플라톤의 동굴, 양자물리학이 말하는 그림자 세계
'플라톤의 동굴 비유' 또한 우리에게 충격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날 때부터 동굴 속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동굴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 그들은 모두 밧줄에 묶여 있고, 동굴 안만을 볼 수 있도록 의자에 고정되어 있다. 그들 뒤에는 모닥불이 있고, 쇠사슬에 묶인 채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있다. 의자에 묶인 사람들은 그 불빛을 통해 뒤에 있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본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외부세계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그림자가 '유일한 실제'라고 생각한다.  

플라톤 (Platon) / 철학자
출생 BC 4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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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영문도 모른채 풀려나 동굴 밖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처음에 매우 큰 충격을 받는다. 두려움에 휩싸이고, 심장박동수가 빨라지며, 눈이 부셔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에, 그는 점점 동굴 안에서 봤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실제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그를 완전히 뒤바꾼다. '실제라고 믿었던 신념의 대상'이 아닌 '진정한 실제'를 만났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양자물리학으로 눈을 돌려 보자. 20세기 물리학의 양대 축으로 불리는 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혹자는 정보이론을 포함해 3대 이론으로 부르기도 한다)은 우리의 무의식 저 편에 자리잡고 있던 몇 가지 근본적인 전제들을 뒤흔들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관계, 에너지와 정보의 본질 등 가장 근본적인 인식의 개념들이 재정립되거나 완전히 대체되었다. 절대공간, 절대시간은 상대적이며 상호연관된 시공time-space이라는 개념으로 달라졌으며, 현대과학의 입장은 더 이상 객관성의 과학이 아닌 상호 주관성의 과학으로 대체되었다. 또한 미시세계에서는 거시세계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물질 개념인 입자와 파동에 대한 관념마저 뿌리채 뒤흔들렸다. 바로 여기서 과학의 본질, 학문의 본질에 대한 문제의식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Transit spatio-temporel (Time & Space Transit)
Transit spatio-temporel (Time & Space Transit) by gilderic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도대체 물리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현대 물리학은 우리를 조롱하고 있는 것일까? 양자물리학의 창시자이기도 한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기초를 닦아 놓은 양자물리학의 몇 가지 역설을 인정할 수 없어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양자물리학에서 보여지고 경험되는 것들이 도무지 기존의 지식체계, 우리의 직관과 맞아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동료이자 당대 최고 석학 중 한 명인 보어는 이에 대해 당신이 신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가?라며 반박했다)   

What’s That? (94)
What’s That? (94) by jurvetson 저작자 표시

양자물리학이 주는 충격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양자 물리학은 첨단의 학문으로서 학문의 권위와 위상을 드높일 것이라 기대되었지만, 바로 그 곳에서 인간의 언어가 상실되었으며, 학문적 권위는 스스로 파괴되었다. 세상에 대한 더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설명을 추구하는 학문이 실제가 아니라 '그림자shadow'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 양자물리학에 의해 밝혀졌기 때문이다. 양자물리학은 언어가 비록 일상에서 실용적이기는 해도 '하나의 상징symbol'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으며, 학문은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 삶에 유익을 주나 가장 근본적인 수준 다시 말해 삶의 본질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피상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실제를 보지 못하게 하는가?
트루먼쇼, 플라톤의 동굴 비유, 양자물리학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의견으로 고통을 겪으며, 지구 곳곳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근본 이유이며,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는 것들에 우리 자신을 바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좀처럼 알아 차리지 못한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상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잘 알지 못하며, 혹 알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물론 감정이라는 것도 개입된다. 동굴 밖을 경험한 한 사람은 실제reality를 경험했다는 것에 대해 큰 기쁨을 느꼈겠지만 이 사실을 동굴 속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는 큰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모두가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의 감정뿐 아니라, 우리가 믿고 있는 몇 가지 전제들이 우리의 현재 삶을 좌우하고 있다. 가장 근본에 깔린 생각은 '내 생각이 나다'라는 믿음이다. 이것은 우리가 언어를 배우기 이전(pre-verbal), 독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기 전(pre-cognitive) 마치 컴퓨터 명령어처럼 우리에게 입력된다. 지구상의 수 많은 의식의 대가들이 언급하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 이것은 하나의 에고ego가 된다. '생각이 나다'라는 신념이 당신을 강력하게 사로잡는 것이다.

Christie at Leadership Retreat
Christie at Leadership Retreat by mikeygibran 저작자 표시비영리

이는 마치 영사기의 원리와 같다. 영사기는 비추는 역할을 할 뿐 어떤 내용을 재생할지 결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컴퓨터와 연결되어 특정 프로그램을 재생하면 그것은 이내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아름다움을 볼 수도 있고, 고통스럽고 우울한 감정을 경험할 수도 있다.
우리의 눈이 바로 이와 같다. 영사기가 단지 어떤 내용을 비추는 것처럼 우리의 눈은 어디를 향하든 그 안에 담긴 것들을 비추기 시작한다. 우리의 마음이 그것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 어떤 것이 있든 그것은 세상을 비춘다. 아름답고 탁월한 것이든, 불편하고 답답한 것이든 그것은 오직 마음을 비춘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내면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외부에서 그대로 경험한다. 
이러한 인식은 과거 뉴턴 역학의 '객관적 관찰'이라는 믿음을 파기한다. 현대 과학(상대성 이론, 양자물리학) 이후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는 믿음이 그 근거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방식대로의 자연을 기술해 왔던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눈 바깥 쪽의) 외부 현실이 우리 내부(마음)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라. 비가 내리는 어느 저녁 당신이 창 밖을 볼 때 당신이 느끼는 것, 당신이 생각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실제인가? 아니면 그저 하나의 견해(그림자)인가?  비가 당신을 우울하게 하는가? 당신의 내면 상태가 그러한 것인가? 좀 더 적확하게 표현해, 당신 안에 비에 대한 어떤 견해, 심상, 느낌이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면 비를 볼 때 그것을 느낄 수 있을까?(이를 물리학적으로 '공명' 현상이라고 한다. 공명현상은 특히 의료기기에 많이 활용되고 있지만, 우리 삶의 대부분의 경험 현상들이 공명현상과 직결되어 있다.)

우리가 실제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수집하고 저장한 어떤 신념 체계들 때문이다. (신념의 사전적 정의는 다른 사람의 동의와 관계없이 확고한 진리로 받아 들이는 개인적인 심리 상태이다. 여기서 다른 사람의 동의와 관계없이라는 표현에 주목하라.) 그것은 오직 그에게 진실이 된다. 그리고 그에게 실제로 일어난 현실이 된다. 그것이 오직 자신의 주장이며, 독자적인 믿음의 체계임에도 그는 신경쓰지 않는다. '생각이 나다'라는 강력한 신념이 그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신념은 하나의 방향키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전체로서의 실제(또는 있는 그대로의 실제)'에서 어떤 특정 부분만을 집중하게 만들고, 종종 거기에 집착하게 만든다. 그것이 어떤 것에의 욕망이든, 저항이든 마찬가지이다.
 
이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 모든 경험들과 관련된다. 행복에 대한 정의, 돈에 대한 관점, 결혼에 대한 의견, 삶에 대한 가치 등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마음 속의 심리 상태, 관점, 신념, 에고의 지배를 받는다.

미리 말해두자면, '의지'또한 하나의 에고이며 신념이다. '의지'는 대체로 잘 정의되어 있지 않은데, 그 본질은 어떤 '장애물'을 전제한다. 의지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몰입과 반대되는 것이며, 자신의 어떤 에너지를 '주도적(이 또한 자연스럽지 않는 상태이다)'으로 끄집어 내는 것을 뜻한다. 자기계발에서 의지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행복해져야 한다고 믿고(이미 존재하는 행복의 실제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위해서는 많은 장애물들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에(이 또한 에고의 환상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불가피하게 의지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성공자(?)들이 의지를 강조하며, 대가지불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또한 하나의 신념이며 투사(projection)이라는 점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평생 이마트에 진열되어 있는 다람쥐처럼 동그란 쳇바퀴를 힘들게 돌려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일반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그런 자기개발은 전혀 필요치 않다. 필자는 자기개발 전문가(?)로서 10년 가까이 활동하면서 이러한 패러독스를 현장에서 많이 봐 왔다.

실제란 무엇인가? 어떻게 실제에 다가갈 수 있는가?
그렇다면 실제란 무엇일까? 나는 여기서 아인슈타인, 보어,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를 사로잡았던 하나의 맥락을 다루고자 한다. 그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이었으며, 양자물리학의 세계 최고의 이론가들이었다. 그들이 연구하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물질세계였으며 그들은 종교나 의식, 신비주의, 영성과는 근본적으로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모두 신비주의자들이었다. (여기서의 신비주의는 국내에서 통용되는 부정적 의미의 그것이 아니다. 신비주의의 본질은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가 아닌 경험으로서만 알 수 있는 삶의 실제를 경험 그 자체로서만 알려고 하는 방법을 뜻한다. 다시 말해, 실제를 있는 그대로 아는 방법은 바로 경험 그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들이 신비주의자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들은 문외한, 문맹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학문의 본성과 본질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최고의 뮤즈, 구루들이었다.) 물질세계를 경시하거나 물리학이 쓸모 없어서도 아니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학문의 필요성, 학문의 지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치열한 고민 뒤 뒤따르는 허탈함, 공허함 때문만도 아니었다. (어느 정도 연관은 있지만 이것이 그들이 신비주의자가 된 근본 이유는 아니었다.) 그들이 신비주의자가 된 이유는 양자물리학에 대한 심오한 연구를 통해 학문이 그림자라는 사실을, 어떠한 언어, 설명, 해석도 우리를 실제 그 자체로 데려다 줄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동양사상을 연구했으며, 전일주의, 하나로서의 세계에 대해 탐닉했고, 있는 그대로의 실제를 경험하기 위해 자주 개인적인 시간을 가졌다.

이를 좀 더 실질적인 우리 삶의 이슈들로 가져와 보면 진로, 행복, 돈, 결혼, 목표, 시간관리 등에 대한 우리의 어떤 믿음들, 신념들에 적용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찬란한 실제는 이런 것들로 규정되지 않을 뿐 더러, 이것들을 성취한다해도 결코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지 못한다.
<의식혁명>의 저자 데이빗 호킨스가 언급한 바대로, 모든 의견은 근본적으로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다른 사람의 평판, 사회적 지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인식하고 지나치게 의식하는 이유는 그것이 내면에서 일어난 어떤 믿음의 투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실제, 완전한 존재감, 탁월한 삶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를 이너게임inner game이라 한다)을 자각해야 한다. 일상에서 빛에 의해 만들어지는 그림자는 그것이 실제가 아님을 쉽게 구분할 수 있지만,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대체로 가려져 왔다. 서구의 기술문명은 우리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행복의 본질로부터 우리를 이주, 격리시켰다.  

커다란 상자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상자의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간의 주의력과 호기심을 다시 발동시키면, 우리는 잃어 버렸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많은 부분들 즉, 행복, 풍요, 탁월함, 인생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성에 영역에 존재하지 않고 경험 그 자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를 경험하는 것, 어떤 의미에서 신비주의자가 되는 것은 초현실주의가 아니다. (필자가 있는 부띠끄 모나코는 '초현실주의'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이 곳은 아주 고요해서 가끔 현실과 유리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반대로, 그것은 진짜 현실을 경험하는 것이며 있는 그대로의 실제를 사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당신이 직면하는 다양한 상황들, 고객접대, 친구사귀기, 자녀양육, 정체된 도로에서 운전하기, 우는 아기 달래기, 미래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 갈매기 조나단과 같이 나는 것 그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된다면 그 삶이 어떻겠는가? 이것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필자를 포함해, 필자의 고객들이 바로 이러한 수준의 삶을 실제로 경험해 봤고, 현재도 그러한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무미건조하고, 결코 유쾌하지 않은 어떤 적막함이나 재미없는 일상도 아니다. 
 
우리가 어떤 신념들, 전제들, 에고들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롭게 되면 지극히 평화롭고 온전한 삶의 상태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최근에는 고객들 중 상당 수가 이혼과 직업에 대한 이슈로 필자를 찾는데, 그들 또한 내면의 목소리, 고요한 진실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삶의 차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진실은 힘이 있다. 왜냐하면 진실만이 실제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에서 만족스럽지 않은 어떤 부분을 생각해 보고, 다음 질문에 답해 보라.

(먼저 당신이 만족스럽지 않게 여기는 어떤 상황을 가능한 자세하게 적습니다. 그 후, 다음 질문에 천천히 답해 보세요.)

1. 그것이 진실인가요?
2.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요?
3. 만약 당신에게 그러한 생각이 없다면 당신의 삶은 어떨까요?
4. 뒤바꿔 보세요.
(처음에 만족스럽지 않은 상황, 문제의 본질을 뒤바꾸는 것입니다. 주어를 바꾸고, 대상의 방향을 바꾸면 자연스럽게 진실이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나는 A의 00때문에 울화가 치밀고, 답답하다. ----> 나는 나의 00때문에 울화가 치밀고, 답답하다. 또는 A는 나에게 계속 00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현재 모습이 00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 작업이 잘 이해되지 않고, 심지어 답답하게까지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편에 다룰 에고의 구조와 인간의 마음의 본성을 이해하고 나면 좀 더 쉬워질 것이고, 더 잘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고요한 혁명이'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을 알아차리고(이를 코칭에서는 '깊은 인지'라고 합니다.), 삶의 초점을 그림자에서 실제로 바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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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ster Coa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