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왜 양자인가?"
"동참하는 우주?"
"의미는 무엇인가?"
"비트에서 존재로?"


첫 번째 질문은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으로서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 있는가?", 다시 말해 "왜 없지 않고 있는가?"이다.

"나는 보는 대로 판정한다." 경험주의자
"나는 사실대로 판정한다." 실재론자
"내가 판정하기 전에, 그것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휠러의 입장

"'의미는 무엇인가?'는 의미의 개념을 정의하는 난해한 철학적인 문제를 표현한다. 메시지 속에 포함된 정보의 '양'을 측정하는 것은 자유자재로 하면서 그 메시지의 '의미'를 다룰 방법은 개발하지 못한 공학자들의 절망감을 과연 풀어 줄 수 있을까?"

"물질적인 세계-존재-가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정보-비트-로부터 구성된다는 것이다. 휠러는 다음과 같은 신비로운 주장을 내놓는다. 모든 존재, 즉 모든 입자와 역장, 심지어 시공 연속체까지도 그 기능이나 의미 그리고 바로 존재 그 자체를 '예-아니오' 질문에 대한 답으로부터 즉 비트로부터 전적으로(상황에 따라 간접적으로라도) 얻는다."

"물리학자들은 수업 때 물리학은 자연의 '어떻게how'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며 '왜why'를 채우는 과제는 철학과 신학에게 맡긴다고 배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는 과학자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왜'를 이해하기를 열망한다. 학생들에게-특히 과학자가 될 생각이 없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정말로 알고 싶어하는 것은 '왜'임에도 불구하고-'어떻게'를 가르치는 일은 모든 과학 교사가 익히 아는 실망스러운 경험이다.

"휠러는 그런 우리에게 실험실과 교실에서 다시 정말로 큰 질문들을 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더군다나 그는 충고를 통해 우리를 그렇게 하도록 설득한 것이 아니라 실례를 통해 우리에게 확신을 주었다. 예언자를 연상시키는 그의 거대한 주장들은 그것들만 외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문적인 노력과 업적과 함께 있다. '어떻게'를 묻는 질문들과 관련한 그의 탁월한 성취들은 그에게 '왜'를 물을 자격을 준다. 그렇게 물리학자로서 권위를 얻은 철학자 휠러는 물리학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그의 뒤를 따르도록 유도한다."

"심포지엄의 주요 강연자인 빈 대학의 안톤 차일링거Anton Zeilinger는 <왜 양자인가? 비트에서 존재로? 동참하는 우주? : 존 아치볼드 휠러의 거대하고 심오한 세 질문과 그것이 양자 실험가에게 준 영감>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휠러의 강력한 영향을 분명하게 증언했다. 차일링거는 휠러의 바람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내일 물리학 전체를 정보의 언어로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그런 생각으로 힘을 얻은 나는 '정말로 큰 문제' 두 개를 추가로 던진다. 첫 번째는 '정보는 무엇인가what is information?'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두 번째는 휠러의 가장 대담한 제안을 현대화하는 것과 관련된다. 즉 '비트에서 존재로?'를 새로운 양자정보quantum information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과제이다. 그렇게 번역하자면, 질문은 '큐비트에서 존재로it from qubit?'가 된다."

"주위의 풍경을 한번 생각해 보라. 주위를 둘러볼 때 당신이 보는 것은 엄청난 양의 정보이다. 당신이 의식하는 것은 분해되지 않은 색과 모양의 덩어리라 할지라도, 그 상은 여러 방식을 통해 자료의 흐름으로 전환될 수 있다. 한 가지 방식은 그 상을 디지털 카메라로 보는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는 상을 0과 1로 번역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이다. 자연은 이미 인간의 눈에서 디지털 카메라 기술을 실현했다. 인간의 눈은 시각적인 자극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다양하게 세분화된 전기적인 충격으로 변환한다. 그 전기적인 충격은 디지털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그림은 눈에 도달할 때까지 개별적인 광자들에 의해 운반된다. 그 운반과정 역시 또 하나의 디지털 코드화이다. 전기적인 신호와 화학적인 신호를 교환하는 세포들의 거대한 연결망인 뇌도 알고 보면 대부분 꺼짐-켜짐 신호의 형태로, 즉 0과 1로 코드화된 정보를 처리하는 강력한 장치이다. 문장을 코드화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일상 언어로 문장을 쓰고, 그것을 모스부호로 또는 모스부호의 컴퓨터 시대 버전인 ASCll로 - 점과 선, 0과 1로-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적인 세계에도 풍부한 정보가 있다. 정보는 우주를 이루는 근본 요소인 듯하다. 우리 인간은 감각을 통해 정보를 얻을 뿐 아니라, 불가피하게 정보를 서로 교환한다. 막 태어난 아기의 첫 울음에서부터, 역사적으로 따지자면 불 주위에 모인 동굴거주자들의 잡담에서부터 위성을 통해 전송되는 이메일 메시지까지, 정보를 향한 욕구는 식욕이나 성욕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근본적인 조건이다."

 "정보 개념은 지난 100년 동안 점진적으로 명료화되었는데, 이는 정보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양인 에너지 개념이 19세기 중반에 탄생한 과정과 분명하게 대조된다. 에너지 개념은 2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발명되고 정의되고, 처음에는 물리학의 주춧돌로 그리고 나중에는 모든 과학의 주춧돌로 정착되었다. 우리는 정보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에너지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에너지는 견고한 과학적 개념이다. 우리는 에너지를 정확한 수학적 용어로 기술하고, 유용한 재화로서 측정하고, 거래하고, 세금을 매길 수도 있다.
 정보 역시 거래되고 제어되기 시작했지만, 그것을 둘러싼 주관성의 아우라aura 때문에 에너지와는 달리 정의하기가 더 어렵다. 에너지는 분명히 물리적인 계 속에 있다.-물질대사에너지는 도넛 속에, 전기에너지는 핸드폰 배터리 속에, 화학에너지는 가스탱크 속에, 운동에너지는 바람 속에 있다. 반면에 정보는 부분적으로 정신 속에 있다. 예를 들어 암호화된 메시지는 어떤 사람에게는 값진 정보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낙서일 수 있다. 수 14159265.....를 생각해 보자. 당신의 사전 지식에 따라, 그 수는 숫자들의 의미 없는 무작위 배열일 수도 있고, ㅠ의 소수점 이하 부분일 수도 있다. 이렇게 정보 개념은 주관성과 관련되기 때문에-정신의 상태에 의존하기 때문에-모호하고, 또 동시에 위력적이다."

"20세기의 과학 혁명은 무생물 세계를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우리의 신념을 뒤흔들었다. 첫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어떤 현상도-심지어 시간의 흐름도-관찰자의 운동상태와 무관하게 기술할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예를 들어 고속으로 날아가는 우주선에 타고 있는 우주인이 읽는 (정확한) 시계는 우주정거장에 있는 시계보다 느리게 갈 것이다. 이는, 먼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가 느린 속도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시계가 단지 더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뜻이 아니다. 시계는 실제로 더 느린 속도로 작동한다. 우주선 속에서는 시간 자체가 느려지고, 우주인의 심장박동과 탈모 속도도 느려진다. 이 주장은 매우 반직관적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로 인해 시간의 객관성 자체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관찰자의 역할을 물리학의 언어 속에 불가피하게 삽입한다."

"이렇게 상대성이론이 우리를 주관성의 심연 가장자리로 데려갔다면, 양자역학은 우리를 그 속에 빠뜨렸다. 양자이론에 대한 지배적인 해석에 따르면 원자와 같은 물리적인 계의 상태는, 시곗바늘이 (우리가 모른다 할지라도) 매 순간 고정된 방향을 가르키는 것과는 달리, 확정적이지 않다. 특정한 원자에 대해 객관적인 진술을 하려면 우선 관찰자는 어떤 성질을 측정할 것인가를 결정하고(여기서는 '원자의 속도'라고 하자) 그에 맞는 실험을 설계해야 한다. 인간은 측정 장치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은 예상되는 가능한 결과들을 제한한다. 만일 다른 장치-예를 들어 원자의 위치를 측정하는 장치-를 선택한다면, 원자 속도의 정확한 값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속도는 단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unknown 것이 아니라, 어둠의 맛이나 희망의 색처럼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unknownable 것이 된다. 원자의 속도는 질문이 올바르게 구성되고 적절한 측정이 수행될 때 비로소 존재한다."

"이러한 양자역학의 필연적인 관찰자 의존성은 이른바 '양자의 신비'의 근간을 이룬다. 그 의존성은 바로 과학적 기획이 자랑하는 객관성에 반기를 든다. 마치 우리가 선택하는 질문에 의해서 실재가 형성되는 듯이 보이는데, 질문을 다르게 선택하면 다른 대답이 산출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휠러에 따르면, 우리의 세계는 '동참하는 우주'이다. 이 세계에서는 관찰자를 배제할 수 없다. 휠러가 희망하듯이,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 정보가 과학에서 정당하게 논의되고 양자역학의 신비에 빛을 비출 수 있을까?"

"관습에 의해 달고 관습에 의해 쓰며, 관습에 의해 뜨겁고 관습에 의해 차갑다. 색깔 역시 관습에 의한 것이다. 실제로 있는 것은 원자와 진공뿐이다."  -데모크리토스domocritus(수학자/철학자)

"물리학은 일차적으로 '저 밖에' 있는 사물들의 세계를 다룬다. 눈앞에 있는 돌의 실재성을 증명하기 위해 주저 없이 그 돌을 발로 찼다는 사전 편집자 존슨dr Samuel Johnson의 유명한 일화는 ' 저 밖에' 있는 사물들이 가진 실재성의 의미를 시사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세계에 대한 수학적인 기술은 물질 속에서가 아니라 분명 인간의 정신 속에서 생겨나고 작동한다.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이 불가피한 얽힘 앞에서, 우리는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을 구분하는 명확한 선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동물원에서 관람객들이 원숭이를 관찰하듯이 우리가 이 세계를 연구할 수 있다는 확신은 어디에서 왔을까? 관람객과 원숭이 사이의 튼튼한 울타리는 인간과 원숭이의 영역이,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의 영역이 분리되어 있고 서로 독립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 그릇된 확신이 언제 탄생했는지는 역사의 행운 덕분에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원자론은 역사 속에서 흥행과 쇠퇴를 겪었고 심지어 긴 침묵의 시기도 겪었다. 그러나 데모크리토스가 역설한 원자론의 원리는 한 번도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었고, 결국 오늘날의 과학에서 지배적인 지위에 도달했다. 단순하고, 더 이상 쪼갤 수 없으며, 명료하게 이해되는 대상-원자-이 복잡한 지각의 세계에 의해 더렵혀지지 않은 채로 '저 밖에', 물리적 실재의 기반에 존재한다는 생각은 거부하기에는 너무 매력적이었다. 원자론은 물리학자들과 화학자들을 인도하는 등대 역할을 했고, 마침내 그들에게 (데모크리토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자연을 지배할 권력을 선사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주문spell-객관성을 향한 꿈-은 지난 2천여 년 동안 과학자들을 확실하게 구속했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이 만든 범주category를 존중하지 않는다. 20세개의 물리학자들은 경험을 통해 그들 자신과 무생물계를 구분하는 벽이 그다지 확고하지 않다는 것과, 많은 경우 (예를 들어 원자 규모의 거리에서) 완전히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절대적 객관성은 매우 쓸모가 많지만,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 개념은 오랫동안 유용하게 사용되어 왔으며 물리학을 (다양한 인간의 반응을 수용해야 하는) 다른 학문들이 선망하는 대상으로 올려 놓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절대적 객관성을 극복하고, 때로는 관찰자와 관찰대상 사이의 상호작용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지성 : 관습에 의해 달고 관습에 의해 쓰며, 관습에 의해 뜨겁고 관습에 의해 차갑다. 색깔 역시 관습에 의한 것이다. 실제로 있는 것은 원자와 진공 뿐이다.
감각 : 가련한 정신이여, 너는 우리를 이길 증거를 우리로부터 얻는가? 너의 승리는 너의 패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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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ster Coa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