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


"그러나 한 원자가 거기 가만히 있다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한순간 갑자기 붕괴한다면, 인과 원리로 볼 때 대체 그게 무슨 뜻일까?
무엇이 붕괴를 일으켰을까? 즉 도대체 무엇 때문에 붕괴가 일어나고 왜 하필 그 순간 붕괴될까?"
-<불확정성uncertainty>, 데이비드 린들리



마리 퀴리Marie Curie. 당신도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폴란드에서 태어나 자유를 찾아 파리로 떠난 그녀는 당시 여성에게 금기시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던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한 뒤 여덟 살 연상의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Pierre Curie를 만나 결혼한다.  그들은 방사성 원소의 발견에 지대한 공헌을 한 과학자 부부다. (1903년 이들은 베크렐이라는 학자와 공동으로 노벨상을 수상한다.)

그들은 폴로늄이나 라듐과 같은 방사성 원소를 발견하고 거기에 직접 이름도 부여했다. 그녀는 당대의 여성으로서는 (과학계 내에서의 냉대와 차별 등) 예상치 못한 엄청난 기여를 했다. 당신이 퀴리의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역사상 수십, 수백만의 과학자들 중 그녀는 분명 역사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과학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진짜 과학자였다. (그녀가 핵폐기물로부터 라듐을 추출할 때 과학 역사상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자연의 질서는 그들을 비껴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방사능에 오염되어 갔다. 이를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그녀는 인류를 위한 절대적 헌신에도 불구하고 끔직한 고통을 겪으며 죽어 갔다.

참으로 가혹하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마리 퀴리의 선택이 그토록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은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녀는 선택의 기회를 가지고 있었지만(방사능을 연구하겠다는 선택) 선택에 필요한 정보(방사능이 가진 위험성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의도가 좋든 아니든, 당신이 열심히 살든 그렇지 않든 자연의 질서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동시에 매우 냉정하게) 작용한다. 설사 갓난 아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없다. 갓난 아이는 오직 순수한 호기심때문에 압력 밥솥에 손을 가져다 댈 수 있다. 그러나 맹렬한 운동에 의해 가열된 기체 분자들은 갓난 아이의 손을 그대로 놔 두지 않는다. 물론 그로 인해 그 아이는 평생 손가락을 펴지 못하고 살 수도 있다.

당신은 정말 풍요를 원할 수도 있다. 현재까지의 삶이 너무도 고되고, 불편했기 때문이다. 천 원짜리 한 장을 사용하는데도 가슴이 두근거렸던 경험, 같은 음식을 먹을 거라면 분위기 좋은 곳보다는 값이 더 싼 곳에 은근히 마음이 더 가는 경험, 휴가철에 돈을 마음껏 쓰고 와서 두고두고 후회한 경험, 누구랑 식사를 하든지 식사값을 낼 때면 두렵고 초조해진 경험, 누군가 특급호텔에 가자고만 하면 통장 잔고부터 걱정되는 경험 등 셀 수 없이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은 이런 느낌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 이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출발점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고 해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목적지가 어딘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만약 당신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고 싶다면 당신은 부산에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부산 어디쯤에 도착하는 것은 당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은가. (이는 당신에게 무한한 시간과 자유가 없음을 전제한 것이다. 또한 당신이 한가롭게 여행을 즐기기에는 너무도 절실한 상황임을 전제한다.)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데 '삶에서 배워 나간다.'는 말이 과연 소용있을까?
당신이 보기에는 어떤 사람은 갑자기 벼락 부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한 평생 리어카를 끌어도 식사 한 끼조차 제대로 때우지 못한다. 도대체 삶은 왜 이리 불공평한 것일까?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상황을 그냥 보고만 계신 것일까? 혹시 나도 저렇게 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걱정과 근심이 없는 날이 단 하루도 없다.

나는 그동안 최소 수십, 수백억대의 부자들은 많이 봐 왔다. 그들과 직접 식사도 하고, 대화도 나누고, 비즈니스의 세계에 대해 심도깊은 대화도 나눴다. 또한 그들 중 상당수는 내 고객이 되기도 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자수성가형 부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경제적 풍요뿐 아니라, 정신적 풍요, 신체적 풍요, 감성적 풍요도 누리고 있었다.

크게 성공한 사람들은 종종 '우연'일 뿐이었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어떤 칼럼니스트의 말대로, 그것은 준비와 기회가 만나 만들어진 우연이었다. 그들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도대체 '풍요'가 무엇이길래?
분명 경제적 풍요는 그 자체가 목적지는 아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지에 도달하는데 상당한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절체절명의 상황이 닥쳐도 굶어 죽지 않게 해 준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마음 졸이지 않고 대처해 나갈 수 있다. (가수 '비rain'가 성공을 거둔 후 첫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돈이 없어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아 보지 못하고 떠나신 것을 제일 가슴 아파했다.)

또한 당신이 정말 제대로 된 자기계발, 또는 의식훈련을 하고자 할 때도 경제적 풍요는 도움이 된다. 감성적(정서적) 풍요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삶을 관찰해 보면, (특히나 한국사회의 경우) 경제적 풍요가 미묘하게 감성적 풍요, 관계적 풍요 등과 연결되어 있는 듯 보인다. 풍요는 분명 전체적인 것이다. 경제적 풍요만이 풍요가 아니다. 삶의 6가지 차원(영적/감성적/지적/관계적/신체적/경제적) 모두 풍요로워야 한다. 이는 인간의 당연한 권리라고까지 할 수 있다. 


-세상은 '제로섬zero-sum' 게임판이 아닌가? 내가 어떻게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는가?
언젠가 '풍요'에 대한 강의가 끝난 후 한 회사원이 내게 다가와 이렇게 질문했다. "경제적 풍요나 재화라는 것이 결국 그 총량이 제한되어 있는 것 아닌가요? 제가 풍요롭게 되면 누군가는 더 가난해질 수도 있을텐데요."

물론 맞는 말이다. (그가 그렇게 믿고 있다는 뜻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사람은 믿는대로 된다.) 그러나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 삶의 6가지 차원의 풍요가 과연 제로섬 게임일까?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다음의 질문들에 답해 보라. 당신이 행복해지면 다른 사람이 불행해지는가? 당신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누리면 다른 누군가는 빈곤한 관계를 맺게 되는가? 당신이 건강해지면 다른 사람은 병드는가?

경제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제적 풍요를 얘기하기 전에 나는 우선 아주 중요한 의식현상에 대해 하나 얘기하고자 한다. 그것은 '풍요'와 '가난'의 분기점에 대한 것이다. 이 질문에 진지하게 답해 보라. 도대체 풍요와 가난의 절대적 임계점은 어디인가? (나는 사회학적 구분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학적 구분법은 지역과 국가가 바뀌면 실제로 거의 쓸모가 없다.) 절대적이라고 말할 만한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을 것이다. 논의를 문명 사회로 제한한다면, 일반적으로 '풍요'와 '가난'은 비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강북과 강남, 관악구와 강남구같은 비교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풍요는 물질적 현상이라기 보다는 심리적이고 영적인 현상이다. 다른 한편으로 의식의 깨어남 정도가 풍요의 수준과 직결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한국사회에서의 부자들의 부의 축적 지도는 상당히 기형적이다. 상당수의 재벌들, 부자들은 마음의 평화와 관계없이 닥치는대로 돈을 쓸어 모을뿐 아니라, 약한 자를 괴롭게 하고 무시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큰 대가를 치르고 있으므로, 풍요로운 사람의 사례에 포함시킬 수조차 없다. 그들은 풍요의 예에서 제외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구소련의 양자물리학자였던 바딤 젤란드가 그의 <리얼리티 트랜서핑> 시리즈에서 아주 상세히 설명해 놓았으므로 생략하고자 한다.


-무엇을 원하는지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안 적이 있는가?
아마도 당신에게는 커피숍에서 주문하는 커피메뉴조차 맘 편히 정하지 못해 머뭇거리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공짜로 선물을 받거나, 로또에 당첨되는 경우를 제외하곤(심지어 이마저도 부담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손쉽게 얻는 경험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들에게는 삶은 단지 감내해야 할 훈련코스일 뿐,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어떤 수확도 얻을 수 없다는 맹목적인 청교도주의의 희생자로 살아간다.

그러나 당신은 안다. 커피숍에서는 원하는 메뉴를 주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레시피도 자신의 취향에 맞게 요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당신은 당신이 주문한 음료가 예상대로 나올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연하기 떄문이다.

하지만 이 당연하다는 말은 더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경험에 의한 것이다. 무수히 많은 경험을 통해 당신은 이 세계의 원리 중 하나를 알게 되었다. 당신은 주문하고, 세상은 당신이 주문한 것을 가져다 준다. (여기서 돈이 의미하는 것은 '풍요'와 '가난'의 개념과는 관계가 없다. 실제로 돈은 매우 추상적인 개념이며,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공식 E=MC^2에서 에너지쪽, 즉 추상성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대부분의 경우 당신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반대로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싫어하는지는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다. 싫어하는 것은 잘 알고 있고,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는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이는 지면의 한계를 벗어나므로 다음 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실제로 거의 없다. 수백, 수천명을 만나 직접 대화를 나눠 봤지만 대다수의 연구논문과 서적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말 모른다.

한 번 대답해 보라.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 3가지는 무엇인가? 언제, 어디서나 단 한 번의 주저함도 없이 말할 수 있는가?


-재현성있는 원리에 기반해 있는가?
사람들은 '원리'란 말만 들어도 골치가 아픈 모양이다. 이렇게 바쁜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기적인데, 전혀 와 닿지도 않는 개념을 들먹이고 있냐는 듯 보인다. 게다가 원리라는 것이 자연의 법칙과 같아서 그대로 따라하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들에게는 항시 긴장감이 감돈다. '전운'이 감돈다고나 할까.

그런데 한편으론 그들이 '원리'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원리라는 것은 한 번 익혀두면 평생동안 언제, 어디서나 활용할 수 있는 것임에도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동안 이런저런 자기계발 프로그램과 읽고 나면 잊혀지는 책들에 지쳐서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들은 원리와 원리가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원리라는 것은 일단 그 존재유무가 확인되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닌다. 당신만의 가치관, 경험치를 따르는 것보다 원리를 따르는 것이 백배, 천배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원리는 '최소량의 법칙'과 같은 형태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삶을 지배하는 가장 핵심적인 원리 중 하나인데 모르는 사람이 훨씬, 훨씬 더 많았다.)

원리는 그 자체로 '재현성'이라는 개념을 내포한다. 성별, 나이, 학력, 경험치, 돈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언제나 동일한 결과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같은 재현성이 원리를 따르게끔 우리를 이끄는 힘이 된다. 


-원리가 있다는 사실조차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아닌가?
그러나 여러 문제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온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듣는 것조차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나는 볼장 다 본 사람이다.', '내가 해 봤는데 제대로 된 적이 없었다.', '당신이 나보다 운이 좋은 사람이다.', '잘난 척하지 마라.', '어차피 돌아갈 때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그러니 욕심부리지 말고 살아야 한다.' 등등 그들의 입에서는 꽤나 설득력있는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물론 이들 모두 어느 정도는 진실이다. (그 신념을 가진 사람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얼마 간의 진실을 함유하고 있는 신념들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신념들은 당신에게 치명적인 독이 된다. 과학자들은 인류의 지식역사에서 가장 큰 변동이라 할 수 있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에 직면했다. 아인슈타인은 당시 20대 중반의 젊은 과학자 하이젠베르크가 발견한 원리때문에 죽는 날까지 불편한 마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집요한 노력의 산물인 ERP 패러독스 또한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과 마찬가지로 근본 오류에 의해 폐기되었는데 이 실험은 양자역학의 모순을 밝히려고 했던 실험이었다. 아인슈타인이나 슈뢰딩거같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들까지 괴롭게 했던 이 원리는 훗날 과학의 정당한 일원으로 인정받게 된다.

당신이 받아들이기 쉬우냐, 그렇지 않으냐는 사실 원리의 입장에서 볼 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마치 중력이라는 힘이 갓난아이라고 예외를 두지 않듯, 당신은 원리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원리를 '따라야 할' 기준이지, 개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지팡이의 한 쪽 끝을 잡으면 반드시 다른 한 쪽도 따라 온다.' 


-절실하지만 그렇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 정작 필요할 땐 너무도 원망스럽고 절실한 것이 돈이고, 건강이고, 풍요이다. 사람들은 풍요를 갈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풍요로운 인간관계, 풍요로운 자산, 풍요로운 지성, 풍요로운 영혼의 상태 등..

그러나 막상 최악의 상황을 벗어나면 그들을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 막상 상황이 조금 나아지고 나니 이대로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금붕어뿐 아니라 인간도 망각의 동물이다. 자신이 처한 상태의 본질을 깊이 자각하지 못하는 점에서 그러하다.

풍요라는 개념은 단지 돈만 많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그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풍요라는 것은 좀 더 정확히 말해 '매 순간순간의 느낌'같은 것이다. 무엇이든 내가 순수하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언제든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느낌말이다. (여기에는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도 포함된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하나 해 주고 싶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실제로는 풍요를 원하지 않는다. 좀 더 리얼한 느낌을 위해 '수동태'의 표현을 빌어 보겠다. 사람들은 풍요를 원하지 않도록 설정setting되어 버렸다.

이 말을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하자면 '내적 불일치'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당신의 마음 속은 '풍요'롭지 않아야 될 수 많은 이유들로 가득하다. '생각이 나다', '신념이 곧 나다'라는 강력한 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이 '수동태 현실'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에게는 삶은 '벌어지는' 일일뿐 아니라, '감내해야'하는 고통일 뿐이다. '내가 이렇게 힘든 삶을 사는 것은 내 부모때문에, 이 망할 놈의 나라때문이 아닌가?'


-삶은 원래 이런 것이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결국에 죽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다.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겨진다면 당장 출가를 해 산속으로 들어가라.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음 속에서는 뭔가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인생이다. (당신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선택권이 있다는 의미이다.) 나의 인생은 아니다. 생각해 보라. 혹시 당신의 오랜 생각을 스쿠루지처럼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미 있는 것, 가지고 있는 것조차 얼음처럼 차갑게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많이 봐 왔다. 돈이 없고, 학벌도 안 되고, 체력도 뒷받침되지 않고 등등... 이유가 만들어내면 수백가지도 넘을 것이다. 그러나 평생 휠체어에서 생활한 스티븐 호킹은 삶에 대해 완전히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강의를 듣는 몇몇 학생들이 먹여 주는 음식을 옆으로 질질 흘리면서도 전혀 기분나빠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감사했다. "이것은 나에게 신의 은총입니다. 이보다 더 뭘 바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지금까지 숨쉬고 살아있는 이유 중 하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열망, 또는 (문자 그대로)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를 자각하고 있지 못하다면 당신의 삶은 순간순간 매우 힘들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답은 당신의 마음 속에 이미 다 들어 있다. 단지 배우려는 마음이 없을 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 중 몇몇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자신은 이미 해 볼 건 다 해 봤다고 푸념한다. 이 모든 것이 과연 무엇때문일까? 왜 나는 열심히 사는데도 별 변화가 없는 것일까?

당신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던지겠다.

'당신은 구조와 원리를 따라 살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열심히, 고생하며, 애쓰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지난 17년간의 여정을 통해 구조와 원리는 인간 삶의 어느 영역에나 존재하며, 이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느낌으로 볼 때) 항상 쉽지만은 않았다. 때로는 내 인생 전체가 뒤엎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 중 어떤 충격은 2~3년 동안이나 지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충격의 본질은 내 삶이 원리와 구조에 기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 내가 인정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궤변들 때문이 아니었다. 이 경이로운 우주는 스스로 정합하고, 자신을 지탱하는 원리들에 충실하다. 우주는 충실한 하수인과 같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나는 론다 번의 '시크릿'과 연관되는 것은 거부한다. 그녀의 이론들은 표면적으로는 다 맞는 얘기기는 하지만, 근본 원리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또 빈틈이 많아 일반 사람들은 결코 따라할 수 없다.)

당신이 위의 질문에 대해 100% 명료하게 답을 할 수 없다면, 당신은 아직 다 시도해 본 것이 아니다. 어쩌면 당신은 아직 출발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삶에 대해 불평하든, 있는 그대로를 즐기며 앞으로 순항을 하든 그건 궁극적으로 당신의 선택이다. (선택은 종종 불편한 느낌을 주는 듯 하지만 이는 가장 명백한 진실 중 하나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각본에 도취되어 당신이 꿈을 꾸는 것인지, 제정신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있어 선택이라는 핵심원리를 인정하지 못할 뿐이다. 

당신이 앞으로 남은 삶을 (나의 친할머님의 삶은 이제 몇 달 남지 않았다. 우리 가족, 친족들 모두가 이를 감지하고 있다.) 자신의 존재대로, 핑계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처방이 필요하다. 먼 길을 돌아가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당신 외에는 아무도 불편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현재의 삶으로부터 진정한 '전환transformation'을 경험하고 싶다면 먼저 원리 앞에 겸손해지는 법부터 배워라. 당신이 어떤 잣대를 들이대든 당신의 이중적인 감정(부러워하면서도 비난하는)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최소한 몇 가지 원리들에 대해서만은 자신을 기꺼이 내어준 사람들이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 그들은 모두 같은 차원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신이 아니라면 타인에 대한 판단을 그치라. 나는 나의 길을 갈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길을 선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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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ster Coa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