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글 남깁니다.
오늘은 앎의 본성에 대해 잠시 글을 남깁니다.
지난 17년간, 수 백명의 사람들을 직접 1:1로 만나고, 수 천명의 사람들과 직간접적으로 만나면서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어떤 공통적인 현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핵심만 간략히 추리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은연 중에 사용하는 말처럼 '대충대충'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고, 물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고 과정도 '대충대충'에서 그치고 맙니다. 전혀 통합적인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아시다시피, 현대물리학(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이 물리학 자신을 스스로 내부로부터 무너뜨리게 된데는 물리학 자체의 체계성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의 오류를 체계적인 탐구를 통해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이것이 부족하거나 없습니다.
-그들은 '원리principle'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원리' 그 자체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동의여부와 무관하게 존재함에도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어 원리에 칼집을 내고자 합니다. 원리는 우리가 따라야 할 대상이지, 굴복시켜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도 않습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는 실제 그 자체가 아닙니다. 굳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다루는 개념들은 본질상 전혀 본질적이지 않습니다. 이는 논리 체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현대인들은 논리적 사고가 그들의 삶의 바탕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상이 이렇고, 내 삶이 이렇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논리적'이다는 말은 실제로 매우 '비논리적'입니다. (왜냐하면 논리 자체가 인간들의 약속 위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정리'는 '공리'를 토대로 하는데, 인간의 '논리', '학문'은 모두 '공리'에서 출발합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의식훈련을 하는 사람들이 '목격' 그 자체가 아닌 '목격자'라는 역할에 집착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논리'로서는 결코 인간 의식 현상의 본성을 완전히 담아낼 수 없습니다.
-'추상적' vs '구체적', '보이는 것' vs '보이지 않는 것', '행복' vs '불행'. 이런 구분들은 애초부터 무의미합니다.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무의미합니다. 이 구분들 자체가 인간 이성의 산물일 뿐 아니라, 그 구분점조차 모호해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합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도 그러합니다. 기업의 HRD 전문가(?)들은 코칭과 같은 도구를 매우 추상적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한의학의 원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도 알 수 있듯,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등가(동등한 가치를 지님)'입니다. '등가'는 돈에 대한 개념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책을 살 때, 표지에 적혀 있는 숫자만큼의 돈을 지불합니다. 그러나 돈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부터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책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고가의 예술품과 같이 추상적인 절차를 거칩니다. 고대인들은 '물물교환'이라는 것을 했는데, 이 당시에는 '물질'과 '물질'을 직접 교환했습니다. HRD 전문가(?)들의 말을 빌면 이러한 물물교환이야말로 구체적인 것일 겁니다. 그러나 오늘날 물물교환은 거의 없고, 오직 돈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화폐는 특정 디자인이 입력된 종이조각을 의미하지만, 그 종이조각의 사회적 가치는 인쇄된 내용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생각이며, 개념입니다.) 구체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은 마음의 산물이자 편견일 뿐입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이분법은 오히려 사람들을 가두고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인간 존재를 이해하려면 통합적인 맥락이 절대적으로 요구됨에도 불구하고(애초부터 나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 두 가지의 학문으로 인간 존재를 잘라냅니다. 마치 먹기 좋게 고기를 썰어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거기서는 어떠한 진실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마치 교통체증에 화가 난 어느 운전자가 앞에 차를 보며 입을 씰룩거리지만, 그 지역 도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표면적인 이유일 뿐, 신호체계나 운전자의 마음 상태, 기온 등은 가시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앎은 '지식의 구조'와 '의식의 구조'에 대한 정합한 이해(과학에서 그러한 것처럼)로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확인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누구나 실험하고 반증해 볼 수 있는 형태로 공개되어 있습니다. 다만 아직까지 국내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삶에 치여, 그들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본질적인 앎에 다가서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덫에서 벗어나려면 '깊은 자각'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精神만 차리면 살 수 있다'라는 말은 어마어마한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精과 신神은 한의학에서 말하는 '정기신精氣神'의 한자와 같습니다. 정精이라는 물질적 세계(몸으로서의 세계)와 신神이라는 추상적 세계(마음으로서의 세계)를 함께 '알아차린다(정신만 '차리면')'라는 뜻입니다. 알아차린다는 것은 '자각'을 의미합니다. 몸과 마음에 대해 모두 깨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려면 몸이 마음에 미치는 영향과 마음이 몸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학문적으로 표현하자면 심리학, 해부학, 신경생리학, 한의학, 양자물리학 등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들은 전혀 어려운 학문이 아닙니다. 만약 200~300년 전의 부모들처럼 어린 시절부터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책을 읽게 했다면 이러한 지식을 기본 상식으로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좀 더 본질적으로 보자면, 순수한 호기심 하나로 충분합니다. 학문이나 정통한 지식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단지 '익숙하지 않은 것'일 뿐이니까요.
부정확한 정보와 지식으로 삶을 고되게 살아가는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특히 '조급함'과 '완벽주의', '체면(정말 그런데도 '아닌 척'하는 것)이라는 무의식에 물든 한국인들의 삶은 여타 나라 사람들의 삶보다 고되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에는 이런 신념이 있습니다. '외부세계나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외부의 현실이 나를 어쩔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이는 집단 무의식이 반영된 거대한 착각illusions일 뿐입니다.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외부세계는 없습니다. 현대과학이나 의식의 대가 중 어느 쪽도 이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이론적, 실제적으로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어떤 사람은 수십년이나 걸리기도 하지만, 이는 본디 자신의 선택입니다. 마음을 여는 사람은 '실제reality' 그 자체를 발견하고, 거기에 머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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